평가당하는 자의 괴로움

평가당하는 자의 괴로움

 

 

내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마음속으로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자신의 외모가 평균선에서 머물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로 '여자들의 90퍼센트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하지만, 남자들의 90퍼센트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잘생겼다고 생각한다'고 하는데, 이 농담은 절반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양심적으로 말하건대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나도 'luser'다).


'거울을 바라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 우선 평가의 대상과 주체가 모두 자기 자신이며, 스스로의 외모를 평가할만한 '객관적 지표'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나는 나보다 키가 더 크거나 작을 수 없다. 나는 나보다 눈이 더 크거나 작을 수 없고, 코가 더 높거나 낮을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은 자신이 잘생겼거나, 적어도 평균은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여자들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외모를 비관한다.

남자들이 이런 식의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잘생겼다'라는 말이 본질적으로 애매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성들의 미를 논하기 위한 '객관적'인 기준은 이미 차고 넘친다. CD 한 장으로 다 가려지는 조그만 얼굴, 34-24-34, 패션 모델들은 그런 외적 기준을 몸으로 보여주는 이들이기에 선망의 대상이 된다. 마치 소나 돼지의 고기 부위를 평가하듯 여성의 신체의 일부만을 떼어내어 '꿀벅지'라고 부른다.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타인의 평가의 대상으로 살아가도록 강제당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자가 '예쁘다'는 말을 이제 우리는 얼굴이 작다느니, 가슴이 크다느니, 콧날이 오똑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개별화·파편화하여 어떤 수직선 위에 올려놓고 언술한다. 대체 얼굴이 작은 것과 미적으로 아름다운 것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단 말인가? 가슴이 큰 여자는 무조건 미인인가? 하나씩 떼어서 물어본다면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얼굴이 조막만하다, 열라 예쁘다' 같은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남자들의 외모가 전혀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자들이 처한 상황과는 분명히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사회에 넘쳐나는 외모에 대한 객관적, 수치적 평가 기준을 여자들은 이미 내면화하고 있고, 그래서 거울 앞에 서면 주눅이 든다. 괜히 다이어트에 목숨 걸고 500그램 줄어들었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남자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정밀한 기준이 개발되지 않았다. 남자들끼리 서로 호빗이니 오크니 찧고 까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아까 꿀벅지가 언급되었으니 그걸 예로 들어보자. 많은 남자들은 '너희들은 초콜릿 복근 어쩌고 하더니'라고 난리를 쳤는데, 애초에 여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의 언어와 남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의 언어는 사용되는 방식이 다르다. 여자들은 꿀벅지라는 단어를 들으면 남들이 나를 핥는 듯이 쳐다볼까봐 신경이 쓰이고, 동시에 예쁘지 않은 내 다리가 너무 싫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반면 남자들은 초콜릿 복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헬스 두 달 해서 배에 王자 새긴 다음 해변에서 여자 존나 꼬시는 상상을 하다가, 귀찮아서 운동 안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웹서핑이나 하면 그만이다. 아니라고 하지 말자. 남자들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 느끼는 최악의 자괴감이라는 것을 여자들은 일상 속에서 늘 느끼며 살고 있다는 말이다.

남자들은 자신의 외모가 평가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모른다.
어차피 외모는 주관적인 거고, 취향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며, 이 드넓은 지구 어딘가에는 나를 나 자신으로 사랑해줄 천사같은 소녀가 한 명쯤은 있을 거라능... 이라는 판타지를 심어주는 문화 컨텐츠 또한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남들이 내게 못생겼다고 해도, 어차피 지들도 장동건처럼 안 생긴 주제에 그런 소리 한다고 비웃으면 그만이다.

'얼굴 큰 남자는 루저'라고 말했더라면 이렇게 파장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180이라는 똑 떨어지는 숫자가 나와버렸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숫자가 180인데, 이건 뭐 거울을 아무리 쳐다보면서 화이팅을 외쳐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보다 키가 크면 대체로 나보다 싸움도 잘 할 것 같고, 여러 모로 꿀리는 기분이 든다.

모든 남자의 키는 180보다 크거나 작다. 그 기준은 다른 기준과 달리 그 어떤 심미적인 판단을 통한 유도리 있는 해석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건 마치 모든 남자가 10억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 않은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평가를 당하면 구석에 몰리는 기분이 들고, 두 배 세 배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오공감에는 자기 어머니가 방송을 보다가 울었다는 실화인지 소설인지가 올라와 있는데, 그것은 설령 픽션이라고 해도 진실이다. 키가 작다는 것은 돈이 없다는 것 만큼이나 '숫자'로 표현되는 진실이다. 그 앞에서 남자들의 열등감은 비로소 진정으로 드러난다.

평가를 당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혹한 평가를 여자들은 언제나 당하면서 살고 있다. 인간의 외모를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눈이 크다는 둥 가슴이 작다는 둥 양화(量化)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처럼 받아들여지는 한국사회에서, 드디어 그 칼날이 남자들에게 직설적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평가의 희생양이 된 것처럼 오버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글을 끝내면 '그래서 지금 막나가자는 거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겠다. 정 그렇게 폭력적인 평가가 싫다면, '나에 대한 폭력적인 평가'에만 반대하지 말고, 애초에 인간의 외모를 사물처럼 만들어서 함부로 논하는 이 한국 사회의 더러운 화법에 대해서까지 문제의식을 느껴보라는 말이다. 꿀벅지가 어쩌고 슴가 사이즈가 저쩌고 얼굴 존나 큰 돼쌍년이 이러쿵 저러쿵 떠들던 자들이 난리를 치면 정말 'luser'밖에 더 되나. 당신에게 들이대진 그 잣대가 가혹하다고 느낀다면, 애초에 인간을 그렇게 평가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by 노정태 | 2009/11/11 23:27 | 트랙백(10) | 핑백(5) | 덧글(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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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반짝 | 2010/05/12 01:54 | 지오스타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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